남이사 건강하건 말건


추억은 미화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추억이라 부를 게 남아 있을까. 사람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서로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건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었다. 다 타버려 재밖에 남지 않은 사랑. 편지에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았던 너는, 질문이 아닌 문자에는 답을 하지 않던 너는, 만나지 않는 날엔 오분 이하의 통화가 전부였던 너는, 이제 와 아무렇지 않게 문자를 보낸다. 끝난 일이라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너와의 통화를 거부하는 내가 잘못인 양.

나만큼이나 그쪽도 다시 시작할 마음이나 미련따위 없다는 걸 안다. 날 만날 때 그 전 여자을 두고 그런 것처럼 지난 날의 상처로 신파극 찍을 소재가 필요한 것 뿐이다. 그 기억들과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빈말이라도 내가 힘이 된다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여자친구는 여자친구였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사람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고, 그에게 내 행복은 안중에도 없었다.

집에 데려다 주던 버스 안에서 내 손등에 사랑해라고 적고 입맞추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 벌써 두 해도 더 지난 일이다. 함께 갔던 바다나 받았던 선물, 날 위해 했던 노력 같은 것에 비하면 작고 사소한 순간이지만 떠올리며 미소지을 수 있는 건 버스 안의 작은 사건 정도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백 가지도 더 댈 수 있지만, 사람을 오래 미워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그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면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


by 섬이 | 2009/10/03 21:53 | 궁시렁 섬 | 트랙백 | 덧글(4)

겨울이 오고 있다



1. 소소한 즐거움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과일이라면 요즘은 단연 복숭아. 단단한 천도 복숭아도 맛있지만 역시 백도의 물컹한 식감을 상쇄하고도 남는 달콤함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봄에 복숭아가 땡겨서 통조림을 먹어봤지만 역시 그 맛이 아니었다. 과일은 역시 제철이 제맛. 다른 계절엔 생각도 안나는 수박을 여름엔 떨어지지 않게 쟁여놓는다던지. 올여름 과일가게에서 수박을 잘라 파는 걸 보고 이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2. 얼음과불의노래, HBO에서 드라마로 만든대서 호기심에 시작해 현재 2부 3권을 읽고 있다. 판타지 특유의 문체(소설과 비소설 중간 쯤인 듯한 건조한 문체?)가 조금 거슬리고 왕과 기사가 등장하는 중세의 여성관이 매우 거슬렸는데 전자는 읽다보니 익숙해졌고 후자는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던 듯. 이 소설의 매력 90%이상은 인물 설정과 그들간의 관계에서 나오는데 그렇게 공들여 만든 캐릭터들을 이토록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니. 모든 등장인물이 괴로워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일 지경이다. 정작 블로그에는 사람좋아보이는 사진을 올려놓고 캐스팅된 인물들을 올려놓으며 즐거워하고 있던데.

3. 판타지 소설들은 한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인지라 한두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왕이면 다양한 책을 읽는 데 시간을 투자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 한달이 넘어가면 레드썬 상태에 들어간다는 곤란함 때문에 판타지는 잘 읽지 않는다. 그나마 본 건, 남는 게 시간뿐이던 중학 시절의 퇴마록과 룸메이트가 소장하고 있던 이영도의 드래곤라자&눈마새 정도일까.

4. 유앤미 콘서트에서 키보드 세션을 맡은 분이 어쩐지 인기가 있어 보이고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길래 나중에 찾아보았더니 긱스 멤버였고 솔로 앨범도 있고 각종 악기에 능통해 천재소년이라는 별명도 있었다는 정재일이었다. 찰랑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건반 두들기는 모습도 매력적이었고 렛잇비때 잠깐이었지만 목소리도 멋지던데. 흠. 뮤비를 몇 개 봤는데 솔로 앨범은 썩 땡기지 않아서 아직 보류중이나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됨.

5. 신종머시기가 아니라도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다. 반팔은 덥고 긴팔은 춥고. 이런 식으로 가을 없이 바로 겨울로 넘어가겠지. 얼불노에서 7년만에 찾아오는 겨울이 몇년이나 지속될지 모른다느니 하던데 그걸 보고 나니 그나마 이정도 예측가능한 현실은 좀 나은가 싶지만, 그래도 이맘때의 저녁 날씨가 지속되는 곳에서 살고 싶다.


by 섬이 | 2009/09/17 21:20 | 궁시렁 섬 | 트랙백 | 덧글(2)

유앤미블루


콘서트 첫 날인 금요일, 공연장이 꽤나 먼 데다가 밤눈이 어두워 길 못찾아서 헤매는 바람에 지각. 어울림누리 직원분들의 친절한 안내로 겨우 들어가서 관람했다.

그냥 뒤쪽이더라도 토욜이나 일욜 표를 예매할 걸 그랬지. 첫 날 공연은 보는 거 아니라잖아. 그래도 금세 음악에 취해서 헤롱헤롱. 처음 이분들 음악에 빠지게 만든 준석님의 청아한 목소리와, 내 혼을 쏙 빼가서 흔들어대는 듯한 승열님의 깊은 음성이 번갈아 나오고, 연주자들이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열정적인 모습이 너무 눈에 잘 들어와서 집중+긴장해서 보았다. 간주치고는 좀 길다싶게 계속되는 연주를 들으며 이 순간이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혹시 약에 취하면 이런 기분일까 실없는 생각도 해보고. 게다가 이런 시크하신 분들을 보았나. 발매예정인 3집 노래가 주를 이루었는데 가사를 아직 안붙였다고 영어로 블라블라. 몇 달 전엔가 있던 공연도 그런 식이었다며. 그때랑 셋리스트도 비슷하게 갈거라고 아쥬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정신없이 빠져서 넋놓고 무슨 곡을 하시던지 그저 ㄳ요 하는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죠. 팬서비스스러운 렛잇비 모두 한소절씩 부르시는 것도 보기 좋았구요.


돌아오는 길엔 갑자기 내린 폭우를 뚫고 오느라 흠뻑 젖어 귀가했지만, 비 뿐만 아니라 음악으로 온몸을 꽉 채운 듯한 시간. 같은 시간을 살고 있어서 참 좋네요.


2009. 9. 11, 고양 어울림누리 별모래극장.

by 섬이 | 2009/09/14 18:45 | 랄랄라 섬 | 트랙백 | 덧글(2)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